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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탑>의 남자, 남자들의 생존법

“장준혁이잖아. 어디서든 넌 존재만으로도 충분해.” MBC <하얀거탑>에서, 최도영(이선균)은 장준혁(김명민)에게 말한다. 그리고 장준혁은 최도영에게 말한다. “너 최도영이야. 장준혁이 아니고 최도영이야.” 최도영은 장준혁을 본다. ‘명인 의대 외과 과장’ 장준혁도, 외과 과장이 되기 위해 부원장 우용길(김창완)과 경쟁자였던 노민국(차인표) 앞에서 무릎 꿇어야 했던 장준혁도 아닌, ‘존재’만으로 충분한 장준혁을. 반면 장준혁은 ‘장준혁이 아닌’ 최도영을 본다. 장준혁과 달리 권력에 관심 없고, 우용길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최도영을. 그래서 장준혁은 최도영이 필요하다. 최도영은 장준혁이 그처럼 될 수는 없지만 인정받고는 싶은 존재다. 권력에 관심 없는 최도영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 수 있고, 그렇기에 장준혁을 ‘명인 의대 외과 과장’이라는 ‘무엇’ 아닌 ‘어디서든’ 충분한 한 명의 의사 장준혁으로 본다. 장준혁은 최도영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권력관계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 격려와 충고를 받을 수 있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은 삶의 모순을 껴안는 사내의 슬픔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부패한 우용길에게는 우용길의 삶의 방식이 있고, 강직한 오경환(변희봉) 과장에게는 오경환의 삶의 방식이 있다. 그러나 장준혁은 우용길과 오경환의 삶 모두를 원한다. 그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 우용길을 ‘절대적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오경환이 어떤 상황에서도 돈과 권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믿는다. 그러나 환자 하나를 치료하는 데도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탐욕스러운 정치꾼과 모든 환자에게 똑같이 의술을 베푸는 올곧은 의사는 양립할 수 없다.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장준혁은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대신 모순을 다 떠안으려 한다. 그는 정치꾼과 의사 양쪽을 모두 열심히 한다. 외과 과장 선거전에서는 스승 이주완(이정길) 과장도 배반할 수 있는 비정한 정치꾼이 되려 하고, 외과 내에서는 처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레지던트 1년차 염동일(기태영)의 어머니의 수술까지 챙기는 자애로운 상사가 되려 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인생을 가르는 수술을 앞두고도 잠을 아껴가며 어머니를 고향집으로 모시는 착한 아들까지 되려 한다.

모순된 인간이 되기 위한 모순된 노력. 정치도 열심히, 의술도 열심히, 효도도 열심히.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장준혁은 우용길과 관계가 틀어질 것을 알면서도 희귀한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지만, 동시에 우용길의 눈치를 보는 정치꾼도 된다. 그래서 그는 우용길에게도 미움을 받고, 최도영을 도와줬음에도 떳떳하지 못한 처신 탓에 그에게 ‘인간적인 면’은 충고를 받는다. 또한 그는 외과에서 좋은 상사이되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그들도 결국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걷도록 만든다.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것도 얻지 못한 삶. 처음엔 실력 때문에 권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됐다. 정치를 잘하면 안 될 것도 되고, 못하면 될 것도 안 된다. 정치를 잘하면 꿈도 쉽게 펼칠 수 있다. 장준혁은 죽었다 깨도 할 수 없는 것을 장인 민충식(정한용)과 그의 친구 유필상(이희도)은 전화 한 통으로 할 수 있는 그 신기한 세계. 그들의 기막힌 처세술을 보며 때론 긴장하고, 때론 고개를 끄덕이는 장준혁의 표정은 마치 어른들의 세계를 신기해하는 아이 같다.

 

장준혁과 최도영의 삶,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어른들의 정치는 아이에게 달디단 권력을 주는 대신, 그의 꿈을 갉아먹는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정년퇴임을 앞둔 외과 과장은 병원을 숨이 헐떡이도록 뛰어다니고, 한국 최고의 외과의와 유수의 개인병원 원장은 룸싸롱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캔커피를 조물락거리며 ‘더 힘센 놈’들의 밀담이 끝나길 기다려야 한다. 그런 더럽고 구차한 인생과 실력 좋고 사람 좋은 의사의 인생을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장준혁은 그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밤을 꼬박 새우며 일하는 자신의 열정과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장준혁에게 남은 것은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해 어머니를 시골집에 모셔 드리고, 수술을 위해 단 한 시간을 자고 사약처럼 독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는 고단한 인생뿐이다. 삶은 언제나 숨이 차고, 마음 놓을 곳은 없다. 그나마 강희재(김보경)에게는 피곤에 절은 모습도, 외과 과장 선거를 두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여줄 수 있지만, 그녀는 사회적으로 떳떳할 수 없는 자신의 정부다. 장준혁의 ‘순수의 시대’를 함께 보낸 친구 최도영은 그가 언제나 ‘어디서든’ 빛나는 존재가 되길 바랐지만, 장준혁은 시간이 흐를수록 ‘명인 의대’의 ‘무엇’이 된다. 외과 과장에서 부원장으로, 부원장에서 원장으로. 그리고 그 뒤에는 지금의 의국장이, 또는 그 순박한 청년 염동일이 장준혁의, 혹은 우용길과 이주완의 고민과 똑같은 고민을 한 뒤, 똑같은 길을 따를 것이다. 아니면 최도영과 오경환의 길을 따르든가. 그 중간은 없다.

 

그래서 <하얀거탑>은 정치와 조직 따윈 상관없던 자신만만한 청년이 돈과 조직과 협잡으로 가득한 ‘어른들의 세계’에 접어드는 그 순간을 그린 일그러진 성장기다. 자신의 꿈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조직과 정치를 선택했지만, 어느새 그들은 그것에 먹혀버린다. 실력과 명예, 그리고 가정의 행복을 모두 얻기 위해 ‘괴물’이 되기를 선택했다가 정말 ‘괴물’이 돼버리는 인생. 그것은 지금 막 메인스트림으로 접어들려는 한국 남자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메인스트림에 접어들려면 ‘당연히’ 조직의 논리를 따라야 하고, 조직을 따르려면 손에 더러운 때를 묻혀야 한다. 정치라는 말이 더 이상 멀게만 느껴지지 않고, 전공 서적을 읽기보다는 친한 사람을 만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 나이. 바로 그때 한국의 남자들은 무슨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어쩌면, <하얀거탑>은 남자들에게 그 선택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지만 구차한 세계에 발 담그지 않을 수 있는 최도영의 세계인가, 아니면 최도영을 동경하지만 결국 최도영은 될 수 없는 장준혁의 세계인가. 선택은 하나뿐.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 인정 못한다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걸 가지려는 순간, 우리에겐 스트레스 때문에 암에 걸리는 장준혁의 고달픈 인생이 기다린다.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건


Posted by 라면한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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